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문단 편집) == 역사 == ||<:> [[파일: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구형).svg|width=60%]] || ||<:> '''2004년~2023년'''까지의 엠블럼. || * 아일랜드 국대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2012, [[아일랜드 라디오 텔레비전|RTÉ]] 방영) - [[http://www.dailymotion.com/video/xr9r0s_green-is-the-colour-episode-1_sport?GK_FACEBOOK_OG_HTML5=1|1]], [[http://www.dailymotion.com/video/xr4x2l_green-is-the-colour-episode-2_sport|2]], [[http://www.dailymotion.com/video/xr9goe_green-is-the-colour-episode-3_sport|3]], [[http://www.dailymotion.com/video/xrfi10_green-is-the-colour-episode-4_sport|4]] 아일랜드 국대의 팀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여 현대 독립국 아일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역사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 1916년에 '[[부활절 봉기]]' 라고 해서 아일랜드 독립의 계기가 된 일대 사건이 터졌다. 아일랜드는 수백년 동안이나 잉글랜드/영국의 지배와 탄압을 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에 와서야 아일랜드에서도 목숨을 건 저항이 시작되려던 때였다. 피로 얼룩진 [[아일랜드 독립 전쟁]](1919~1921)과 [[아일랜드 내전]](1922~1923)을 거치며 독립국의 윤곽을 드러낼 때에 아일랜드 축구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1880년 [[벨파스트]]에서 [[아일랜드 축구 협회]](IFA)가 설립된 이후 [[아일랜드 섬]] 전 지역의 축구 행정은 IFA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북아일랜드]] 6개주는 영국령으로 잔류하고, 남아일랜드 26개 주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반쯤 독립[* [[자치령]]의 지위에 있었다. 1937년에 헌법을 개정해 완전 독립을 선포한다.]하면서 IFA와 분리된 아일랜드 자유국의 축구협회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같은해 아일랜드 자유국의 '아일랜드 축구 협회(FAI)'가 출범하였다. 이후 아일랜드는 같은 해에 프로 리그 창설과 FAI컵 등을 만들어 축구 발전에 매진했고, 3년 뒤인 [[1924 파리 올림픽]] 1라운드에서 불가리아와 역사상 첫 A매치를 치러 1-0으로 이겼다. 미국과의 홈 데뷔전에서도 3-1로 이겨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동안 팀은 국내외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실력 부족도 이유 중 하나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아일랜드 국민들의 무관심이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축구보다 민족 고유의 스포츠인 [[게일릭 풋볼]]과 [[럭비]]를 더 사랑했으며 축구는 찬밥 신세였다고 한다. 거기에 FAI는 아일랜드가 완전히 공화국이 되기[* 1937년에 독립을 선포했을 때는 영국 국왕과 아일랜드 대통령이 모두 국가원수였다. 1948년에 공화국법을 제정해 영국 국왕의 국가원수 직위를 박탈했고 1949년에 영국이 이를 인정했다.] 3년 전인 1946년까지만 해도 북아일랜드 출신 선수 역시 국대에 등록 가능했다. 193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이후 아일랜드는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아일랜드 전 지역의 영유권를 주장하였는데 기존의 IFA가 '아일랜드 축구협회'로서 대표권을 주장하며 독립해나간 남아일랜드에서 선수 선발을 계속하자 FAI 역시 대표권을 주장하며 북아일랜드에서 선수 선발을 이어나갔는데 민족/종교 갈등이 지속된 상황에서 대표팀의 결속을 깨뜨리는 결과를 빚었다. 여기에 한 지역에 2개의 축구협회와 축구대표팀이 병립하여 서로 동일한 선수를 선발하는 등 자꾸 혼선이 빚어지자 FIFA는 FAI와 IFA의 선수 선발 권한을 아일랜드-북아일랜드 경계를 따라 분리하기로 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FAI는 IFA가 FIFA에 재가입한 1946년부터 남아일랜드 출신만 국대에 발탁하기로 하면서 북아일랜드와의 결별을 선언하여 두 팀은 완전히 갈라졌다.[* 다만 이때 FIFA가 선수 국적에 대해서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기에 국적을 쉽게 바꿔서 뛸 수 있었고 톰 아르네, 렉 라이언, 데비 월시, 콘 마틴, 4명의 선수는 IFA와 FAI 대표팀으로 모두 경기에 출전했다. 두 국가가 같은 조가 아니였기에 가능했고 한 월드컵에서 두개의 국가대표로 모두 뛴 유일한 사례. 지금은 FIFA가 주관하는 경기(친선 경기 제외)에 이중국적자 선수가 국가대표팀을 골라 1초라도 출전하면 국적을 절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지역예선에서 FAI 대표팀로 뛰고 있던 4명이 한창 지역예선 도중에 IFA 대표팀으로 뛴 것이었고 이에 FAI가 FIFA에 항의하였다. 결국 IFA 역시 FIFA의 결정을 수용하여 1950년부터 남아일랜드에서 선수 선발을 중단하면서 지금의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되었다.] 이후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1960년대에 [[조니 자일스]]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나와 활약했지만, 아일랜드는 번번이 월드컵이건 유로 대회건 죄다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1973년부터 7년간 자일스가 감독까지 맡아 활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86년에 잉글랜드 국대 출신이자 '더티 리즈'의 리더였던 [[잭 찰튼]]이 감독이 되어 [[프랭크 스테이플턴]], [[크리스 휴튼]], [[로니 웰란]], [[믹 매카시]], [[존 올드리지]], [[나이얼 퀸]], [[패키 보너]], [[폴 맥그래스]] 등의 우수한 선수들이 출현하면서 또다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렇게 닻을 올린 (재키)찰튼호는 [[유로 1988|88유로]] 대회 5위[* 8개국(8강) 본선 진출 대회]를 시작으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과 [[1994 미국 월드컵]][* 마지막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에 연속 진출하며 각각 8강 8위와 16강 16위에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을 냈다. 아일랜드의 첫 88유로[* 8개국(8강) 본선 진출 대회이며 8강 조별리그로 진행하고 다음 4강 토너먼트로 진행했다.] 첫 상대는 공교롭게도 잉글랜드였다. 경기 장소는 슈투트가르트의 네카어 슈타디온(현 메르세데스 벤츠 아레나). 이 경기에서 아일랜드는 전반 6분에서 [[레이 호튼]]의 골로 1-0으로 이겨 전 유럽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소련에게 비기고 네덜란드에게 패해 대회 5위로 4강 진출 실패했지만, 잉글랜드 역시 같이 광탈당하면서 외롭지는 않았고, 아일랜드의 역대 유로대회 최고 순위 5위를 기록했다.[* 88유로 최종순위에서 6위 스페인을 제치고 아일랜드가 유로 5위를 기록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에선 '''조별리그[* 24강 조별리그] 3경기를 전부 무승부'''로 통과하고, 심지어 '''16강도 무승부'''여서 승부차기로 8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8강에서 이탈리아에게 1:0으로 석패하여 8강 8위로 마쳤다. 이론상으로 잘만하면 조별리그[* 24강 조별리그] 3경기와 16강-8강-4강-결승까지 '''7전 7무로 우승'''할수 있다는 것을 반증할수 있는 사례가 될 '''뻔'''했다. 이로써 이탈리아에서 1988년의 돌풍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 아일랜드는 [[유로 1992]]에는 못 나갔지만 영건 [[로이 킨]]이 가세하면서 '''[[유로 1992]] 우승국 덴마크를 떨어뜨리고''' 또 다시 진출한 1994년 월드컵[* 마지막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에서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첫 승리를 따냈다. 6년전 잉글랜드를 광탈시킨 그 호튼이 이번에는 장거리포 한 방으로 이탈리아의 골문을 초토화시켰다. 아일랜드는 조 2위로 16강에는 갔지만 네덜란드에게 6년만에 또 졌다. 한편 아일랜드에게 진 이탈리아는 결승까지 갔다. 1996년부터 [[유로 1996]][* 첫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 본선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잭 찰튼 감독의 후임으로 감독직에 앉은 믹 매카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네덜란드를 떨어뜨리고''' 7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며 조국에 월드컵 본선 티켓을 선물했다.[*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이란을 떨어뜨린 것은 덤.] 팀의 핵심 미드필더 로이 킨이 사이판에서의 훈련 캠프 도중 FAI의 무성의한 태도와 훈련 장소 섭외를 규탄하며 아일랜드로 조기에 귀국하는 악재가 있었지만, 그래도 3골이나 터뜨린 [[로비 킨]]의 활약으로 16강 진출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16강전에서는 스페인에게 [[승부차기]]까지 가서 탈락하여 16강 12위로 마쳤다. 이후엔 통 재미를 못 보고 있는데, 2009년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프랑스와의 유럽 지역예선 플레이오프에서 [[티에리 앙리]]의 [[신의 손]] 사건으로 억울하게 탈락하기도 하였다. 조금 부연설명을 하자면, 플레이오프경기에서 1,2차전 0-1, 1-0, 합계 1-1로 동률이 되어 연장전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앙리의 어시스트를 받은 갈라스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패배. 문제는 앙리에게 패스가 들어가는 시점에서 이미 오프사이드였고, 앙리는 자신을 지나가는 공을 손으로 쳐서 컨트롤하고 왼발로 들어오던 갈라스에게 어시스트를 하였다는 거다. 즉 명백한 핸들링 반칙. 재경기 여론이 높았으나 결국 프랑스가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는 월드컵 본선에서 '''[[남아공 쇼크]]'''라는 대사건을 일으키며 [[좆망|제대로 망했고]], 아일랜드 언론은 그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조금이나마 [[복수]]를 했다. 이후 유로 2012에선 베테랑인 [[데이미언 더프]]가 마지막 불꽃을 태워 플레이오프 끝에 에스토니아를 제치고 유로2012[* 마지막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에 진출했다. 하지만 조별리그[* 16강 조별리그]에서 크로아티아에게 1-3, 스페인에게 0-4, 이탈리아에게 0-2로 지면서 3전 전패 1득점 9실점으로 조 꼴찌는 물론 대회 최하위 유로 16등으로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이후 [[마틴 오닐]] 감독과 로이 킨 체제로 개편하여 [[리빌딩]]에 [[나름]]대로 [[성공]]한 아일랜드는 [[유로 2016]] 예선을 극적으로 통과하고 이탈리아, 스웨덴, 벨기에와 E조에 편성되어 스웨덴에 1-1 무, 벨기에에 0-3 패, 이탈리아에 1-0 승으로 1승 1무 1패로 16강에 진출했으나, 16강전에서 개최국 프랑스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앙투안 그리즈만]]에게 2골을 허용함으로써 1-2로 탈락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는 세르비아, 웨일즈, 오스트리아 같은 팀과 한 조에 들어가 비교적 할만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결국 마지막 데스매치에서 웨일즈를 이기고 2위를 차지해 플레이오프로 올라갔다. 플레이오프에서 덴마크를 만났는데 원정에서 잘 비겨놓고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지역예선(유럽)/플레이오프#s-4.3.2|홈에서 학살당하면서]] 또다시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로비 킨]], [[존 오셔]], [[셰이 기븐]], [[데이미언 더프]], [[이언 하트]], [[맷 홀랜드]], [[케빈 킬베인]]으로 대표되던 [[2000년대]] 초 전성기를 이끈 멤버들의 퇴장 이후로는 확실히 성적이 신통치 않다. [[키어런 클라크]], [[셰이머스 콜먼]], [[제임스 매클린]]. [[셰인 롱]], [[로비 브래디]] 등이 현 대표팀의 주축이지만, 무게감은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자국리그가 탄탄하지 않아 다음 세대 선수 양성에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섬 위쪽]]이 동시에 약진하는 상황이라 씁쓸한 상황이다. 자국리그가 이웃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 비해 형편없이 약한 편이고 심지어 섬 위쪽 북아일랜드 리그보다도 경쟁력을 가진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국내 축구기반이 약하다. 따라서 많은 축구 유망주들이 어릴적부터 잉글랜드 리그 유스팀에 건너가 축구를 배우고 또 프로에 데뷔하는 기형적인 인재 양성 구조를 가지고 있어, 아일랜드 대표팀 선수들은 대부분 잉글랜드 리그 소속인 경우가 많다. 2020년 [[유로 2020]] 예선 플레이오프에 소집된 선수들의 명단만 봐도 [[대런 랜돌프]] (웨스트햄), [[엔다 스티븐스]] (셰필드), [[맷 도허티]] (토트넘), [[제프 헨드릭]] (뉴캐슬), [[로비 브래디]] (번리), [[제임스 맥카시]] (팰리스), [[코너 하우리헨]] (아스톤 빌라), [[셰인 롱]] (사우스햄튼) 등 프리미어리그를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엥? 이 선수가 잉글랜드 국적이 아니었어?'' 할 만한 선수들이 대거 포진되어있다. 이번 명단에 빠진 선수들 중에서도 [[셰이머스 콜먼]] (에버튼), [[키어런 클라크]] (뉴캐슬), [[데이비드 맥골드릭]] (셰필드) 등 EPL 소속 아일랜드 선수들이 정말 많다. 하부리그인 [[EFL 챔피언십]]으로만 내려가도 아일랜드 선수들의 숫자는 훨씬 많이 늘어난다. 아일랜드의 23세 혹은 21세 이하 대표팀에는 [[트로이 패럿]] (토트넘), [[마크 트레버스]] (본머스), [[퀴빈 켈러허]] (리버풀), [[마이클 오바페미]] (사우스햄튼), [[아론 코널리]], [[에반 퍼거슨]] (브라이튼) 등 각 팀의 준주전급 유망주들이 많기 때문에 향후 아일랜드의 축구 성적을 기대해 볼 만 하다. 아일랜드의 가장 큰 불안요소는 [[데클란 라이스]]같은 사례가 또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영국-아일랜드 이중국적자 선수들은 두 나라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대대로 있어왔으며 최근 잉글랜드 대표팀에 합류한 [[잭 그릴리시]]도 원래는 아일랜드 청소년 대표로 활약한 선수였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중국적자들의 국적변경은 두 나라 사이에서 비일비재했다.[* 잉글랜드 주포 [[해리 케인]]만 해도 아버지가 아일랜드인이라 아일랜드 대표팀 제의를 먼저 받았을 정도다. 또한 [[웨인 루니]]도 아일랜드계 집안에서 태어난 잉글랜드인으로 그의 동생인 존 루니는 뉴욕 레드불스 활약 시절 아일랜드 대표팀으로 뛰고 싶다는 의사도 피력한 적이 있다.][* 반대로 [[에이든 맥기디]]는 스코틀랜드 태생이지만 아일랜드 국적을 선택해 최근까지 대표팀 주력 윙어로 활약했었다.] 다만 아일랜드 태생의 선수 중 너무 어릴 때 영국으로 건너가는 유망주들이 많아 잉글랜드에서 오래 활동한 뒤 잉글랜드 국적을 취득해 잉글랜드 국대로 이적해버리는 상황을 제일 우려했지만, 그동안엔 아일랜드와 영국 간 역사적 문제도 있고 해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고 봤었다. 그런데 이게 처음 현실로 나타나버리고 아일랜드 협회는 무진장 욕을 먹었으며, [[데클란 라이스]]도 살해협박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20년 들어서 현재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가장 큰 문제는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매 경기마다 0:0 무재배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2020-21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 달랑 1득점만 기록하였는데, 그 득점도 공격수가 아닌 중앙 수비수인 [[셰인 더피]]였다. 게다가 이 네이션스 리그 유일한 득점이 2020년 A매치중 유일한 득점이다. 과거에는 [[로비 킨]]같은 믿음직한 공격수나, 네임 밸류는 떨어져도 조너던 월터스나 [[셰인 롱]] 같은 선수가 종종 골을 넣어줬는데 이제는 나이도 많을 뿐더러 이만큼 해줄 수 있는 포워드가 아일랜드에 현재 없다. 빨리 포워드 쪽의 세대 교체가 시급한 시점이다. 스티븐 케니 부임 이후 역사상 최악의 부진에 빠져있다. 2020년 4월 4일에 케니가 감독직을 맡은 이후 2021년 9월 8일 현재까지 1승 8무 7패를 기록 중이다. 그나마 1승을 거둔 것도 [[안도라 축구 국가대표팀|안도라]]와의 친선 경기였다. 결국 카타르 월드컵 예선에서는 탈락했다. 여담으로 2021년 9월 2일의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과의 경기에는 89분까지 [[존 이건]]의 골로 리드를 지키고 있다가 각각 89분, 96분에 터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골로 패배했는데, 이 두 골로 호날두는 사상 A매치 최다 득점자로 올라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